소헤왕후인 인수대비
소혜왕후가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르자 남편 도원군은 의경세자로 책봉되었고, 자신은 왕세자빈으로 책봉되어 수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457년 남편이 갑자기 사망하자 세자 자리는 시동생 해양대군(예종)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예종이 즉위한 지 14개월 만에 요절하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였습니다.
인수대비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무척 박식해서 한문에 밝았기 때문에 자성대비는 "나보다는 문자를 아는 며느리 수빈이 수렴청정에 적합할 것이다."라며 사양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한문에는 밝지 못한 시어머니 자성대비 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유교경전은 물론 범어에도 조예가 깊어 불경을 언문으로 번역하고 내훈을 짓기도 했습니다.성종은 즉위 후 친아버지 의경세자를 회간왕, 의경왕, 덕종으로 추존하여 종묘에 모셨습니다. 따라서 소혜왕후도 회간왕비, 의경왕비, 덕종비, 인수왕대비, 인수대비 등으로 불렸습니다. 소혜왕후는 정희왕후, 성종과 함께 며느리 윤씨를 폐비하는데 깊이 관여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이 심화되었고, 갑자사화가 진행되던 1504년(연산군 10) 4월에 창경궁의 경춘전에서 사망하였습니다.